평가위원은 배점표부터 봅니다
배점이 큰 항목에 분량과 근거를 몰고, 항목 이름을 소제목으로 쓰고, 예시 숫자는 베끼지 않는 법.
초안을 다 쓰고 저장을 누른 뒤에 양식 마지막 장을 넘겨 봤더니 표가 하나 있습니다. "평가 항목", "배점", "평가 내용". 이제야 봤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니 배점이 제일 큰 항목에 쓴 분량이 제일 적습니다.
이 장면을 여러 번 봤습니다. 제가 겪기도 했고, 옆에서 도와주다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양식을 받으면 맨 뒤부터 폅니다. 배점표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그걸 먼저 읽습니다.
배점표는 채점표다
평가위원은 하루에 여러 건을 읽습니다. 손에는 배점표가 있고, 항목마다 점수를 적어 넣습니다. 우리 계획서가 잘 썼느냐가 아니라, 이 항목에 몇 점을 주느냐로 읽힙니다. 그러니 배점표가 곧 채점표입니다.
배점표는 보통 사업계획서 양식 맨 뒤, 아니면 공고문의 "평가 방식"이나 "선정 절차" 항목에 붙어 있습니다. 없는 공고도 있습니다. 그럴 땐 "평가 내용"이라고 적힌 문장이라도 찾으세요. "문제 인식, 실현 가능성, 성장 전략, 팀 구성" 같은 낱말이 나오면 그게 배점표 역할을 합니다.
배점표 옆에 붙은 "평가 내용" 칸은 항목 이름보다 더 중요합니다. 거기 적힌 문장이 평가위원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목표 시장의 규모와 진입 방법의 구체성"이라고 적혀 있으면, 답해야 할 것은 둘입니다. 시장이 얼마나 큰가,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둘 중 하나만 쓰면 반만 답한 겁니다.
배점이 큰 곳에 분량과 근거를 몰아라
예를 들어 배점표가 사업화 전략 40점, 문제 인식 20점, 팀 역량 15점이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분량도 대략 그 비율로 갑니다. 사업화 전략에 페이지 절반 가까이, 팀 역량엔 한 장 남짓. 이걸 뒤집어 쓰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는 데 절반을 쓰고, 정작 배점 큰 항목은 두 문단으로 끝냅니다.
페이지 제한이 있는 양식이면 계산이 쉽습니다. 총 페이지에 배점 비율을 곱해서 항목마다 몇 장을 쓸지 먼저 정하고, 그 안에서 씁니다. 넘치면 배점 작은 항목부터 줄입니다. 쓰고 나서 줄이는 것보다, 처음부터 칸을 정해 두고 쓰는 게 훨씬 덜 아픕니다.
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점 큰 항목에는 숫자, 표, 화면 캡처, 계약서 사본 같은 걸 붙이세요. 배점 작은 항목은 문장으로 짧게. 평가위원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40점짜리 항목에서 근거가 없으면 깎일 폭이 크고, 15점짜리 항목은 잘 써도 올라갈 폭이 작습니다.
항목 이름을 소제목에 그대로 써라
배점표에 "시장 진입 전략"이라고 적혀 있으면 소제목도 "시장 진입 전략"으로 쓰세요. "우리가 시장을 여는 법" 같은 제목은 읽는 사람이 좋아할 것 같지만, 평가위원은 채점표의 항목을 계획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못 찾으면 없는 걸로 칩니다. 페이지를 뒤지게 만들지 마세요.
양식이 소제목을 이미 정해 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는 손대지 말고 그 밑에 채우면 됩니다. 양식이 비어 있고 배점표만 있다면, 배점표 항목을 순서대로 소제목으로 옮기세요. 그게 목차입니다.
소제목 밑 첫 문장은 그 항목의 결론으로 시작하세요. 평가위원이 첫 줄만 읽고도 점수를 적을 수 있게.
작성요령의 예시 숫자를 베끼지 마라
양식 칸 옆에 회색 글씨로 "예: 투자유치 1건, 10억 원" 같은 안내가 있습니다. 작성요령입니다. 이걸 지우고 우리 숫자를 넣어야 하는데, 급하면 그대로 두고 냅니다. 저도 한 번 그랬습니다. 다른 항목은 다 우리 얘기인데 목표 표에만 예시 숫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평가위원은 같은 양식으로 온 계획서를 수십 건 읽습니다. 예시 숫자를 그대로 둔 계획서는 바로 알아봅니다. 그 자리는 "안 썼다"가 아니라 "성의가 없다"로 읽힙니다. 작성요령은 어떤 종류의 숫자를 넣으라는 안내지, 그 숫자를 넣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시 숫자를 살짝 바꿔 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근거 없이 "투자유치 1건, 5억 원"으로 고쳐 봐야 옆 항목과 안 맞습니다. 목표는 우리 사업 기간과 지원 규모에서 계산해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원금으로 개발자 한 명을 뽑는다면, 그 사람이 협약 기간 안에 만들 수 있는 만큼이 목표입니다. 그 계산이 보이면 숫자가 작아도 점수를 받습니다.
배점표는 평가위원이 우리에게 보내는 힌트입니다. 이렇게 읽을 테니 이렇게 써 달라는.
오늘 할 일
양식을 받으면 배점표부터 복사해서 빈 문서 맨 위에 붙이세요. 항목 이름을 소제목으로 세우고, 배점 순서대로 분량을 배정한 뒤에 쓰기 시작하세요. 쓰다가 막히면 그 항목의 "평가 내용" 문장을 다시 읽으면 됩니다. 거기 무엇을 보겠다고 적혀 있는지가 곧 답입니다. 배점표가 없는 공고라면 평가 내용 문장을 항목 삼아 같은 순서로 하면 됩니다.
Pensiv로 초안을 받았더라도 배점표는 직접 한 번 더 대 보세요. 초안은 양식을 따라가지만, 어디에 분량을 몰지는 결국 쓰는 사람이 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