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계획서 작성 · 4분 읽기

사업계획서는 한 줄이 다 정합니다

기술 우위·검증된 실행력·시장 확장 중 하나를 먼저 고르면 항목마다 다른 회사가 나오는 일이 사라집니다.

사업계획서는 한 줄이 다 정합니다

지난달에 한 대표님이 초기창업패키지 계획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문제 정의에서는 "우리만의 원천 기술"을 말하고, 실행 계획에서는 "이미 고객사 셋이 쓰고 있다"고 하고, 성장 전략에서는 "동남아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는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장을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이 회사는 뭘 잘하는 회사예요?"라고 물었더니 대표님이 잠깐 멈추셨습니다.

그 잠깐이 평가위원한테도 똑같이 옵니다. 평가위원은 하루에 계획서를 여러 부 읽습니다. 한 부에 쓰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회사는 이런 회사"라는 한 줄이 잡히지 않으면, 나머지는 아무리 잘 써도 흩어진 정보로 남습니다.

같은 회사라도 갈 수 있는 길은 셋입니다

회사를 설명하는 서사는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기술이 앞서 있다는 이야기, 이미 해 봤고 되더라는 이야기, 그리고 시장이 열려 있고 우리가 먼저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기술 우위, 검증된 실행력, 시장 확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셋 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셋 다 쓰면 하나도 안 남는다는 겁니다. 기술 우위로 가면 문제 정의는 "기존 방식이 왜 기술적으로 막혀 있는가"가 되고, 팀 소개는 연구 이력이 앞에 오고, 사업비는 개발에 몰립니다. 검증된 실행력으로 가면 문제 정의는 고객이 실제로 겪은 장면으로 시작하고, 팀 소개는 영업과 운영 경험이 앞에 오고, 사업비는 이미 되는 걸 더 빨리 돌리는 데 쓰입니다. 시장 확장으로 가면 시장 분석이 문서의 중심이 되고, 팀은 그 시장을 아는 사람이 앞에 서고, 돈은 진입에 씁니다.

같은 회사, 같은 팀, 같은 제품인데 세 문서는 목차 순서부터 다릅니다. 그러니 첫 장을 쓰기 전에 어느 길로 갈지 골라야 합니다.

못 고르면 항목마다 다른 회사가 나옵니다

서사를 안 고르고 쓰기 시작하면 보통 이렇게 됩니다. 문제 정의는 기술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대표님이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시장 분석 칸에 가면 갑자기 시장 크기 이야기가 되고, 실행 계획에 가면 "이미 고객이 있다"가 나옵니다. 각 칸을 채울 때 그 칸에 제일 그럴듯한 말을 넣은 겁니다.

글솜씨 문제가 아닙니다. 문장은 다 매끄러운데 방향이 없는 겁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세 회사를 만난 셈입니다. 기술 회사, 영업 회사, 시장 선점 회사. 평가위원이 궁금한 건 "이 돈을 주면 뭐가 되는가"인데, 문서가 세 가지 다른 답을 내놓으니 어느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예전에 이렇게 써서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평가 의견은 "핵심 경쟁력이 불분명함" 한 줄이었습니다. 다 넣었는데 불분명하다니, 그때는 억울했습니다. 지금 보면 정확한 평이었습니다.

어느 길인지는 공고가 알려 줍니다

그럼 셋 중에 뭘 고르느냐. 회사가 제일 자신 있는 걸 고르고 싶어지지만, 먼저 볼 건 공고입니다. 공고에는 이 사업이 왜 돈을 주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기술 사업화가 목적인 공고와 매출 성장이 목적인 공고는 같은 회사한테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배점표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기술성 배점이 크면 기술 우위, 사업성이나 실적 배점이 크면 검증된 실행력, 시장성 배점이 크면 시장 확장 쪽이 유리합니다. 배점 구성은 공고마다 다르니 올해 공고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볼 건 우리한테 증거가 있는 쪽입니다. 기술 우위를 말하려면 특허든 논문이든 비교 실험이든 남한테 보여 줄 게 있어야 하고, 검증된 실행력을 말하려면 매출이든 계약서든 사용자 수든 숫자가 있어야 합니다. 증거 없는 서사는 선언문이 됩니다.

창업 직후라 실적이 없으면 검증된 실행력은 애초에 고를 수 없습니다. 그럴 땐 남은 둘 중에서 공고가 원하는 쪽으로 갑니다. 공고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겹치는 자리, 거기가 한 줄입니다.

한 줄을 고르면 뺄 것이 보입니다

서사를 고르고 나면 신기하게도 쓸 게 줄어듭니다. 검증된 실행력으로 가기로 했으면 기술 설명은 "왜 되는지"를 두 문단으로 줄이고, 나머지 자리는 고객이 어떻게 썼고 뭐가 달라졌는지에 씁니다. 기술 우위로 가기로 했으면 고객 사례는 기술이 현장에서 통한다는 증거로만 짧게 씁니다.

한 줄을 정했으면 모든 항목이 그 한 줄의 근거여야 합니다. 근거가 안 되는 문단은 아무리 잘 썼어도 뺍니다.

이게 제일 어렵습니다. 잘 쓴 문단을 지우는 건 아깝습니다. 그런데 그 문단이 다른 서사의 근거라면, 남겨 두는 순간 문서가 다시 두 회사 이야기로 갈라집니다.

오늘 할 일 하나

지금 쓰고 있는 계획서가 있으면 맨 위에 빈 줄을 하나 만들고 이렇게 써 보세요. "이 회사는 ___ 때문에 이 돈을 받아야 한다." 빈칸이 한 번에 채워지면 서사가 이미 있는 겁니다.

세 가지가 동시에 떠오르면 공고의 배점표를 다시 펴고 하나만 남기세요. 그 한 줄이 정해진 뒤에 첫 장을 써도 늦지 않습니다. Pensiv가 초안을 쓰기 전에 서사부터 고르게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