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개발 과제보다 사업화 과제를 먼저 쓰세요
평가 기준, 후속 의무, 정산 방식이 어떻게 다르고 회사 단계별로 먼저 쓸 쪽을 고르는 법.
공고 목록을 내려 보다 보면 비슷한 제목이 줄줄이 나옵니다. 기술개발 과제, 사업화 지원, 마케팅 바우처, 판로 개척. 우리 회사는 제품도 만들어야 하고 팔기도 해야 하니 전부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고문을 열면 요구하는 서류와 평가 항목이 전혀 다릅니다.
이 둘은 돈의 목적이 다릅니다. 기술개발(R&D) 과제는 "아직 없는 것을 만들어 보라"는 돈이고, 사업화 과제는 "있는 것을 팔아 보라"는 돈입니다. 이 차이를 모르고 쓰면 계획서가 어정쩡해집니다. 만들겠다는 건지 팔겠다는 건지 평가위원이 헷갈립니다.
평가위원이 보는 것이 다르다
기술개발 과제 평가표에는 기술성, 개발 목표의 구체성, 연구 방법, 연구 인력 같은 말이 올라옵니다. 평가위원 자리에 그 분야 교수나 연구원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분들이 보는 건 "이게 기술적으로 되는 일인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 팀이 해 본 적이 있나"입니다. 매출 계획은 뒤쪽에 조금만 나옵니다.
사업화 과제는 반대입니다. 시장이 어디이고, 누구에게 얼마에 팔 것이며, 이 돈을 받으면 매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봅니다. 평가위원도 기술자보다 투자자, 유통 전문가, 기업 대표가 많습니다. 기술 설명이 길면 오히려 "그래서 팔리기는 하나"라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요구하는 서류도 다릅니다. 기술개발 쪽은 연구 인력 명단과 보유 장비, 선행 기술 조사 같은 것을 내라 하고, 사업화 쪽은 매출 증빙과 거래처 현황, 판매 계획을 내라 하는 식입니다. 어느 쪽 서류가 지금 우리 회사에 더 쉽게 나오는지만 봐도 방향이 절반은 정해집니다. 연구 인력 명단에 적을 이름이 대표 하나뿐이라면 기술개발 쪽은 아직 이릅니다.
같은 회사가 같은 제품으로 두 과제를 다 쓸 수 있습니다. 다만 계획서는 완전히 다른 글이어야 합니다. 한쪽에 냈던 계획서를 제목만 바꿔 다른 쪽에 내면, 양쪽 평가위원 모두에게 절반짜리 글로 보입니다.
받은 뒤가 더 다르다
여기서 많이들 놀랍니다. 기술개발 과제는 받고 나서 할 일이 많습니다. 연구노트를 쓰고, 중간 보고와 최종 보고를 하고, 과제가 끝난 뒤에도 몇 년간 성과를 보고하는 의무가 붙는 사업이 있습니다. 개발한 기술로 매출이 나면 지원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기술료를 두는 사업도 있습니다. 정산은 인건비, 재료비, 연구활동비 같은 비목별로 증빙을 맞춰야 하고, 비목 사이에 돈을 옮기는 데 제한이 있습니다.
사업화 과제는 상대적으로 가볍습니다. 바우처 형태라면 지정된 수행기관에 서비스를 받고 그 비용을 정산하는 식이고, 직접 지원이라면 마케팅비, 시제품 제작비, 전시회 참가비처럼 쓴 곳이 분명한 항목을 영수증으로 맞춥니다. 대신 성과 지표가 매출이나 계약 건수로 잡히는 경우가 많아서, 끝날 때 숫자로 보여 줘야 합니다.
정산 규정과 후속 의무는 사업마다 다르고 해마다 바뀝니다. 그러니 공고문의 "사업 관리"나 "협약 및 정산" 항목을 반드시 읽고, 애매하면 담당 기관에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담당자는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일입니다.
저는 첫 과제를 기술개발로 시작했다가 정산 서류에 파묻혀 정작 개발은 뒷전이 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직원 한 명이 반년 동안 영수증만 붙였습니다. 개발은 개발대로 늦어졌고, 최종 보고서를 쓸 때는 결과물보다 증빙 철이 더 두꺼웠습니다. 그때 알았으면 순서를 바꿨을 겁니다.
우리 회사는 어느 쪽부터
기준은 지금 팔 물건이 있느냐입니다. 시제품이 없고 만드는 데 시간과 사람이 필요하다면 기술개발 과제부터 봅니다. 사업화 과제는 팔 물건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돈이라, 물건이 없는 상태에서 쓰면 계획이 공중에 뜹니다. 반대로 제품은 나왔는데 고객이 안 붙는 단계라면 사업화 과제가 맞습니다. 이때 기술개발 과제를 쓰면 "이미 만든 걸 왜 또 만드나"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노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제품의 다음 버전을 기술개발 과제로, 지금 버전의 판매를 사업화 과제로 나눠 쓰는 식입니다. 다만 두 계획서가 같은 인건비나 같은 결과물을 겹쳐 청구하면 안 됩니다. 이중 지원으로 걸리면 둘 다 잃을 수 있습니다.
처음이라면 사업화 쪽을 먼저 권합니다. 서류가 상대적으로 가볍고, 받은 뒤 의무가 덜하며, 그 과정에서 정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몸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 경험이 있어야 기술개발 과제의 무거운 관리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원사업은 돈을 받는 일이 아니라, 받은 돈을 설명하는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은 하나입니다. 우리 회사에 지금 팔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한 줄로 적어 보세요. "있다"면 사업화 공고를, "없다"면 기술개발 공고를 먼저 여세요. Pensiv에서 추천 목록을 보실 때도 그 한 줄을 옆에 두고 보시면 고르는 시간이 훨씬 줄어듭니다.